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_죽음의 부정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와 그 부산물은
모두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
영원히 살 것 같이 행동하지만
사실 너무나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시간이 갈수록 죽음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탈함을 표현하거나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나 보다.
"비웃거나 한탄하거나 혐오하지 말고 오직 이해할 것"
<죽음의 부정>
이 책을 보는 태도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한 그대로를 적용해야할 것 같다.
인간의 본성.
영웅주의에 대한 심리와 영웅주의의 실패.
그리고 영웅주의의 딜레마라는 주제로 살펴보는
깊이있는 죽음에 대한 고찰.
책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의 공포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보편성은 인간학의 여러 분야에서 수집된 자료를
하나로 묶는 끈이며
인간 행위를 놀랍도록 명료하게 이해하는 열쇠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
삶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밝혀주는 열쇠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에 있는 인간 동물은 세상에 대해 부분적으로 죽었으며,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잊어버리고 삶을 살아지는 대로 내버려둘 때 가장 '존엄'하다. 그는 주변의 힘에 안온하게 의존해 살아가고 스스로를 가장 장악하지 못했을 때 가장 '자유롭다'. 다른 한편에 있는 인간 동물은 세상에 지나치게 예민해 세상을 닫아버리지 못하며 자신의 변변찮은 힘에 의존해야 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데 가장 덜 자유롭고 스스로를 가장 장악하지 못했을 때고 가장 비천하다. 자신을 어느 이미지와 동일시하기로 선택하는가는 대체로 자신에게 달렸다. 이제 이 이미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_ 책 중에서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잊어버리고 삶을 살아지는 대로 내버려둘 때 존엄하고
주변의 힘에 안온하게 의존해 살아가고 스스로를 가장 장악하지 못했을 때 자유롭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귀였다.
과연 우리는 이럴 때 가장 존엄하고 자유로울까.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적 한계에 대한 승리를 과학적, 신화적으로 구성하는 것과 같은 원대한 기획은 과학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기획은 창조의 악몽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대중의 필수적 에너지에서 비롯하며, 심지어 인간의 손으로 프로그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어떤 형태를 띨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서 어떤 쓰임새를 찾아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언가 - 대상이나 우리 자신-를 만들어내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것을 (말하자면) 생명력에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_ 책 중에서
책의 마지막에 써 있는 글귀이다.
죽음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유추해볼 수 있는 글귀이다.
이 책이 결국 하고자하는 말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본성, 삶과 죽음의 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에 관한 신학적, 심리학적 통찰!
이 책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 <시카고 선 타임스>
<죽음의 부정>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읽는 동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책이였다.
그만큼 깊이 있는 내용이었고, 그래서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그리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죽음을 바라보고
이를 통한 생명력을 얻어 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