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괴로운 이유, 철학자들의 시선으로 보다
기말고사가 가까워질수록, 재현이는 예전 시험에서 실수한 순간이 떠올랐다. 답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계산 실수를 했던 그 순간, 그 시험지 위의 빨간 X. 지금도 밤에 불을 끄면 그 장면이 떠오르고,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왜일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그 기억은 계속 나를 붙잡고 괴롭게 만들까? 다른 사람은 다 잊은 일일지도 모르는데, 왜 나만 이렇게 반복해서 떠올릴까? 기억은 나를 도와주는 걸까, 아니면 방해하는 걸까? 오늘은 그 질문을 가지고 철학자 세 사람과 함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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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 “기억은 강자의 특권이 아니라, 약함의 흔적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본 사상가입니다. 그는 『도덕의 계보』에서 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과 자아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가 되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가령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규범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반복적으로 상기하고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즉, 기억은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흔적이자, 약자에게 부과된 자책의 장치일 수 있다는 비판입니다.
니체는 ‘망각’도 하나의 건강한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망각이 있어야 인간은 전진할 수 있고, 지나간 실패에 매달리지 않으며 새롭게 창조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억은 고통을 되풀이하고, 망각은 삶을 지탱한다.”
학생들이 시험 실수나 창피했던 일을 자꾸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건, 오히려 그 상황을 ‘잊지 못하도록 학습된 탓’일 수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기억이 너를 붙잡거든, 너는 그 기억을 다시 해석하라. 그리고 그 고통을 너만의 힘으로 바꿔라.”
그에게 있어 진정한 인간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조차 새롭게 해석하며 초인처럼 자기 삶을 창조해나가는 존재입니다.
📘 불교 – “괴로움은 기억 자체가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근원을 ‘집착’에서 찾습니다. ‘고(苦)’의 원인을 설명하는 사성제(四聖諦) 중, 두 번째 ‘집(集)’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에 담긴 감정, 해석, 기대, 아쉬움 등이 함께 엉켜서 마음에 ‘붙들려 있는 상태’, 그것이 고통의 핵심입니다.
불교의 대표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현재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다.”
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기억을 없애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억에 휘둘리지 않도록 ‘관(觀)’하라고 합니다.
기억은 파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며, 거기에 ‘내가 붙들려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시험에서 틀린 기억, 창피했던 말실수, 오해받은 사건—all 그 자체가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에 ‘나는 왜 그랬을까’, ‘난 왜 늘 이런가’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마음이 고통을 만든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명상을 통해 기억을 관찰하고, 떠나보내는 훈련을 합니다.
청소년들에게도 이 사유는 유익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 그것을 그냥 '지나가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마음의 자유입니다.
📘 프로이트 – “기억은 무의식의 언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며, 인간의 마음 속 무의식의 구조를 탐구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기억이 단순히 과거 사건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과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재현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반복해서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이나 장면은, 무의식 속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신호라고 봅니다. 이른바 '강박 반복(compulsion to repeat)'이라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실수한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 실수가 나의 ‘자기 가치’와 연결되어 있는 상처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기억은 단순히 그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정서와 자기 해석을 되새기게 하는 도구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기억이 나타날 때, 그것을 억누르기보다 의식 위로 끌어올려 ‘말할 수 있어야’ 해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운 기억이 반복될 때, 그것을 “난 왜 이렇게 못하지?”라고 억누르기보다, **“그 실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라고 묻고, 말하고, 써보는 것이 기억의 힘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입니다.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더 깊이 만나게 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질문 나의 생각 오늘의 실천
최근 나를 괴롭힌 기억은? | ||
그 기억이 떠오를 때 드는 감정은? | ||
오늘 그 기억을 어떻게 해석해보고 싶은가? | ||
오늘 내게 필요한 마음가짐 한 문장 |
기억은 단지 과거의 저장소가 아닙니다. 기억은 내가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 지금의 나를 다시 묻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니체는 기억을 해석하라고 했고, 불교는 기억을 흘려보내라고 했으며, 프로이트는 기억을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당신을 괴롭히는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을 통해 당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세요.
마무리 멘트